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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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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s: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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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1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Category 2 중세・근세의 유파와 학파(中世・近世の流派と学派)
타이틀(Title)
이세신도
일본어표기
伊勢神道
본문(Text)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외궁에 봉사한 와타라이(度会) 집안의 신관, 특히 간누시(神主)들이 창도한 신도설이다. 주로 와타라이 씨족(氏人) 중에서 창도자가 배출되었다고 해서 와타라이 신도, 또는 제신론(祭神論)이나 양궁관(両宮観) 등 교학이 외궁 중심이어서 외궁 신도라고도 한다. 그 교설은 가마쿠라(鎌倉)・무로마치(室町)시대의 전기와 도쿠가와(徳川)시대의 후기로 이분된다. 우선 전기를 보면, 와타라이 신관들이 소의경전으로 삼은 신도오부서(神道五部書)가 주목된다. 오부(五部)의 신서(神書)란 ①『天照坐伊勢二所皇太神宮御鎮座次第記』(阿波羅波記・神記第二), ②『伊勢二所皇太神御鎮座伝記』(大田命訓伝・神記第一), ③『豊受皇太神御鎮座本紀』(飛鳥記・上代本紀), ④『造伊勢二所太神宮宝基本記』, ⑤『倭姫命世記』(太神宮本紀下)를 가리킨다. 이 오부서 중에서도 ①②③은 이세의 사관(祠官)들 사이에서는 「신궁삼부서(神宮三部書)」로 받들어지고 ‘비서(秘書)’나 ‘비기(秘記)’로 여겨졌기 때문에 60세 미만인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부서에 『天口事書』, 『古老口実伝』 등 칠부(七部)를 덧붙인 ‘신도십이부서(神道十二部書)’는 미야가와(宮川) 밖으로 내놓지 않는다는, 즉 이세신궁 밖으로는 내놓지 않는다는 금하(禁河)의 서(書)로 중히 여겨졌다. 이 서적들의 저자로 여겨지는 아와라와노 미코토(阿波羅波命)나 사츠키마로(五月麻呂) 등을 보면 나라시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통설은 가마쿠라중기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전기의 이세신도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립 이유로는 율령제의 붕괴로 인한 신궁경제의 동요, 분에이(文永)・고안(弘安)의 원구(元寇,가마쿠라중기 분에이 11년1274과 고안 4년1281의 2차례에 걸친 몽고의 일본침략)로 인한 위기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료부신도설(両部神道説)의 전개에 따른 영향도 컸다고 근년에는 지적되고 있다. 고대 율령제의 파탄으로 인해, 신궁 진좌 이후에 연혁을 가지는 가미산군(神三郡,이세신궁의 신령神領인 와타라이군度会郡, 다키군多気郡, 이이노군飯野郡)에서는 헤이안(平安)말기부터 유력한 사원이나 권문세가(権門勢家)의 장원화가 진행되고, 가마쿠라 초기에는 이백수십 곳에 달하는, 신에게 받칠 음식을 만드는 장소인 미쿠리야(御厨)・미소노(御薗)가 많이 생겼다. 또 신궁 최대의 제의(祭儀)인 식년천궁제(式年遷宮制,정기적으로 신전을 새로 만들고 신좌를 옮기는 것. 이세신궁은 원칙적으로 20년에 한번씩 이루어지고 있다)도 엔기(延喜)의 식문(式文)에 있는 조신관사(造神官使,이세신궁의 조영造営 및 신보神宝・장속装束 등을 관리)의 전사조체(殿舎造替,샤덴 등을 새로 만드는 것)로 할 수가 없어, 시라카와(白河)천황시대에는 대신궁(大神宮)의 역부공미(役夫工米)에 의존하는 중세의 형태로 변해갔다. 덧붙여 대외관계가 긴박한 속에서 와타라이 신관들은 일본을 습격한 몽고군의 병선(兵船)이, 이른바 신풍(神風)을 만나 조난당했다는 것으로 신궁의 가제노미야(風宮)의 신위(神威)를 선양하고, ‘신국사상(神国思想)’을 환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와타라이 신관들은 서서히 체계적인 신도론을 형성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전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의 한 사람인, 외궁장관을 역임한 와타라이 유키타다(度会行忠)는 고안 8년(弘安,1285)의 『伊勢二所太神宮神名秘書』1권을 비롯하여 『古老口実伝』, 『心御柱記』를 저술했다. 또 무라마츠 이에유키(村松家行)는 송학(宋学)의 새로운 사상을 수행하면서 분포 원년(文保,1317)에 『神道簡要』1권, 겐오 2년(元応,1320)에 『類聚神祇本源』15권을 완성하고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에유키도 남조(南朝)의 충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히가키 츠네요시(檜垣常昌)도 중요한 인물이다. 츠네요시는 겐토쿠 2년(元徳,1330)에 무가를 토벌하기 위한 기도(武家追討御祈)에 임하여 가마쿠라 정부로부터 혐의를 받고, 『文保服仮令』을 저술해서 미노(美濃)・오와리(尾張)의 참배자에게 정진법(精進法)을 내세웠다. 그들이 골자로 한 교설의 특징은 다음의 여러 사항에서 볼 수 있다.
(1)와타라이씨의 먼 조상을 아메노무라쿠모노미코토(天牟羅雲命)에서 아메노히와케노미코토(天日別命)까지로 하고, 구니노미야츠코(国造,지방의 호족으로, 조정이 임명하고 그 지방을 통치하는 세습제인 지방관)인 오츠와카코노미코토(大若子命,오하타누시노미코토大幡主命)의 오츠와카코노미코토(弟乙若子)가 내궁에 진좌할 때에 오칸누시직(大神主職)을 받았다고 한다. 즉, 와타라이씨는 외궁에 진좌한 후 네기(禰宜)가 설치되기까지 내궁에서 봉사해 왔다고 주장하고, 이궁겸행(二宮兼行,내외 양궁의 동일시)의 논거로 삼았다.
(2)외궁의 제신을 곡식의 신열(神列)에서 빼고, 천지개벽에 앞서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天御中主神)의 원기일수(元気一水)의 덕으로 관련지었다. 게다가 그 수덕(水徳)을 지상에서 받은 구니토코타치노미코토(国常立尊)로 발전시켜서 다른 이름인 도우케코타이진(豊受皇太神)으로 설명했다.
(3)아메노미나카누시(天御中主)를 수덕신(水徳神)으로 보는 입장에서, 내궁의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와의 관계를 수화(水火)・음양(陰陽)・일월(日月)로 비정(比定)했다. 「일월유계(日月幽契)」라는 신비적인 이유를 붙인 것에서 일천(日天)・월천(月天)이 함께 천하를 비추는 것과 같이, 이궁일광(二宮一光)이 고르게 이세의 양궁에 쌍좌(双座)한다고 한다. 이렇게 아마테라스의 존호(尊号)는 양궁에 미치고, 외궁의 제신조차도 ‘아마테라시마스토유케오오카미(天照坐止由気大神)’라고 읊게 되었다. 전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다카노미야미카시기노모노이미(多賀宮御炊物忌)로 근무한 야마다 오지모토미치(山田大路元長)는 『元長参詣記』를 분메이 3년(文明,1481) 80세에 저술하였으나, 그 때 마침 세력을 더해가고 있던 요시다(吉田)신도에 압도되어 갔다. 후기의 사상은 도쿠가와시대, 외궁의 곤네기(権禰宜)인 데구치 노부요시(出口延佳)의 새로운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와타라이사문(度会四門)의 흐름을 이어받은 노부요시는 쇼인네기(正員禰宜)가 되지는 못했지만, 게이안 3년 (慶安,1650)에 저술한 『陽復記』2권을 비롯하여 『神宮秘伝問答』1권, 『中臣祓瑞穂抄』2권, 『神代巻講述抄』5권 등 저작이 많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太神宮神道或問』에 ‘천신・지신으로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중극의 도’‘위의 한 사람보다 밑의 만민이다 행하는 아침・저녁의 도’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신도는 중용을 극단적이지 않고 평이하며 흔히 보고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상적인 도라고 해석하고 있다.
②야마토히메노미코토(倭姫命)를 깊이 존경하고 신앙하며 『倭姫命世記』를 최상의 경전으로 받들고, 정직과 청정의 주덕(主徳)이야 말로 사람들의 지침이라고 역설한다.
③『出口延佳神儒仏説』에 ‘신도도 불교도 유교도 노장도 버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혼합해서도 안 된다’라고 설명한다. 그러한 이교관(異教観)은 신유불의 이론적인 차이를 명확히 하면서도 유불이나 노장을 신도에 원용(援用)하려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노부요시는 도요미야자키문고(豊宮崎文庫)를 창건해서 오직 신서(神書)의 수집・교정에 힘썼고, 외궁교학의 전당에서 수많은 인재를 낳았다. 마치 오래되어 폐절한 신궁제도가 회복세를 보이는 시대기운이 있었고, 가와베 키요나카(河辺精長)는 셋샤(摂社)・맛샤(末社)의 재흥, 아들인 노부츠네(延経)는 덴샤(殿舎)의 정비, 가와사키 노부사다(河崎延貞)와 마츠모토 토모히코(松本智彦)는 제의(祭儀)의 부흥 등 실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나중에 요시미 요시카즈(吉見幸和)가 겐분 원년(元文,1737)에 『五部書説』12권과 『弁偽書造言総論』, 『宗廟社稷問答』의 3부작으로 이세신도를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하시무라 마사노부(橋村正身)가 『開国神都考』에서 반론을 내놓아 도화선이 되었다.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宣長)는 바람직한 양궁관계를 염원하며 『伊勢二宮さき竹の弁』을 완성했고 이는 사후인 교와 원년(享和,1801)에 출판되었다.
나카니시 마사요시(中西正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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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e Shintū